신앙의 땅_의정부교구 신앙의 길 제7구간(부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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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명예기자 작성일18-03-12 10:25 조회80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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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최태용 레오
심신이 지친만큼 즐겁게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곳보다는 조용히 걷고 휴식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의정부교구 신앙의길 7구간(부활의 길)이 눈에 들어온 이유다. 신앙의길 중 제4구간부터 제7구간은 목자의 길이다.
그 중 제7구간은 경기 북부지역의 가장 오랜 교우촌으로 알려진 우고리공소 지역이 중심이다. 지금은 성가소비녀회 의정부관구 본원이 있는 곳으로 언젠가 교구의 소중한 장소로 부활할 것을 기다리며 ‘부활의 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길의 의미는 교구의 중심에 있는 성지를 순례하는 길과 약 100년 전 뮈텔 주교님께서 직접 공소를 방문하신 길을 중심으로 한 목자의 길을 따라 걷는,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다.
갈곡리공소에서 성체조배 한 후 오른쪽 운동장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따라 올라 가면서 문득 자문했다. 매일을 열심히 살려고 하지만 목숨까지 걸 만큼 무언가를 위해 간절하게 살고 있는가?
잠시 후 갈림길에서 오른쪽 급경사를 5분정도 오르다 보니 오래 돌보지 않은 무덤이 있다. 무덤을 따라 10분정도 올라가니 콘크리트로 된 군 참호가 있다. 이곳에서 일행들과 한숨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험준한 산세에도 교우들이 찾아오는 덴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선조 신앙인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간절함이 세월을 타고 묵묵히 흐르고 흘러 형성된 신앙의 길. 내 자신을 위해 선택했던 레지오 활동이 힘들다며 투정을 부렸던 일행들은 숙연해 졌다. 현재의 고통을 사사로이 만들고 다짐을 잡게 하는 이 길은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신념을 가지고 7구간의 목적지까지 걸어가라고 말하고 있다.
세 번째 봉우리를 향해 오르다보니 포장도로와 만난다. 포장도로를 따라 600m 정도 걸으면 정면에 노고산이 보인다. 잠시 후 오거리에서 5시 방향 비포장도로를 따라 내려가면 삼현2교가 있다. 다리에서 오른쪽 오르막길로 올라서면 우고리 천주교 묘지다. 여기에서 점심을 먹고 오른쪽 30m 거리에 있는 우고리공소 자리로 갔다.
아름다운 신앙공동체 우고리(가라비, 우골) 이야기
우고리공소는 최소한 1883년 이전에 공소로 설립되었다. 우고리(또는 우골)공소는 뮈텔 주교 일기에 ‘가라비’라는 순 우리말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공소로서, 뮈텔 주교가 신부시절에 사목하였던 지역 중 한 곳이다. 1880년 11월11일 황해도 장연에 상륙한 뮈텔 신부는 이듬해 배천으로 피신하였으나 인근의 소요로 1881년 3월 서울로 피신합니다. 이후 1885년 파리로 소환될 때까지 서울에 남아 경기도의 공소들을 순방하며 성사를 주었고, 가을에는 멀리 강원도 지방까지 순회합니다. 이때 우고리공소를 사목하였습니다.
경향잡지 1935년 7월호에 ‘고(故) 민 대주교(뮈텔 대주교) 각하께옵서 신부시절에 전교하시던 자취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단행본 809호)’라고 우고리공소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뮈텔 대주교를 우고리 교우들이 잊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 경향잡지 1934년4월호(단행본779호)기사에 나와 있다. 뮈텔 신부가 파리에서 지낼 무렵인 1890년 2월21일 블랑 주교가 사망하였다는 전보가 파리에 도착하였고, 그 후임에 뮈텔 신부가 임명되어 조선대목구장직을 계승하게 됩니다. 이후 뮈텔 대주교는 교구장으로서 한국에 재입국하게 되는데, 열렬한 환영식이 있었다고 한다.
뮈텔 대주교가 교구장으로서 자신이 신부시절에 사목하였던 우고리공소를 공식 방문하게 되는 것은 교회기록 안에서는 1918년 12월18일인데, 그 날 일기를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9시에 가라비공소로 떠났다. 그저께 넘은 고개를 다시 넘어야 했는데 이쪽 편이 더 가파르고 더 어려워보였다. 11시에 공소에 도착했다. 공소는 35년 전에 방문했던 옛 가라비공소에서 몇 리 떨어져 있었고 옛 공소 자리는 산 저쪽에 있다.” 즉 최소한 1918년의 35년 전인 1883년에 가라비공소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 보면, 우고리공소는 ‘황해도 배마당의 천주님의 용사’라고 일컬어지는 박내원(프란치스코) 신앙선조와 관련되어 있다. 박내원(프란치스코)는 한국에 입국한 뮈텔 신부와 리오빌 신부를 두 달간 집에 은신시키고 대접하였는데, 이 사실이 탄로나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군난(교안)이 평정될 때까지 우고리공소로 피신하였다고 한다. 그 후 그는 경기도 화성군 왕림리로 이주하여 그곳 왕림공소 회장일을 보다가 수원시 고색동으로 옮겨 그 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뮤텔 대주교가 신부시절 사목하던 우고리공소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우고리공소는 최소한 1883년 이전에 설립되었을 것이다. 물론 신앙공동체의 역사는 공소설립 이전 일 것이다. ‘광적성당 유래’라는 광적성당 측의 글에서 “조선 말엽 극심한 천주교 박해로 인하여 신앙 선조들이 1872년 경 논산 연기에서 박해를 피해 남종삼 성인의 후손(남씨, 김씨, 박씨, 최씨)을 비롯하여 6가구가 처음으로 이 고장 우고리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현재까지 최성우 신부가 수집한 교회기록에서 찾을 수 없었고, 아마도 그 후손들이거나 우고리 지역 원로들의 증언인 것 같다.
‘치명일기’를 보면, 1866년 병인박해 때 양주 일담리 출신들의 순교기록에 나오고 있다. 1895년 간행된 치명일기는 뮈텔 주교의 명에 의해 전국의 순교자들을 대대적으로 조사하여 기록한 책으로, 877위의 순교자들의 순교사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이중 다섯 분이 양주 일담리 출신이다. 참고로 치명일기에 적힌 순교자 877위 중 24위가 1968년 10월6일 복자품에 오르시고, 1984년 5월6일 기해·병오박해 순교자 79위와 함께 시성되었다.(의정부교구 신앙의길, 순례 자료에서 발취)
우고리공소 터를 지나 제7구간의 마지막 순례길인 광적성당에 도착 했다. 명동성당을 축소 한 것처럼 보이는 예쁜 광적성당은 130년 전 우고리(가라비)공소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당이다. 성당 안에 들어가 순례동안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자랑스러운 순교자 후손답게 살아 갈 것을 다짐했다.
의정부 신앙의길 7구간(부활의 길) 구간, 거리
갈곡리공소 → 첫번째 봉우리(0.75Km) → 두번째 봉우리(1.3Km) → 포장도로와 만나는 곳(1.6Km) → 노고산이 보이는 오거리(2.5Km) → 우고리 천주교 묘지(4.0 Km) → 성가 소비녀 수도회 의정부본원(4.7Km) → 우고리 마을회관(6.6Km) → 무지개 사료로 가는 다리(7.4Km) → 광적성당(8.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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